해외현장 사우디 아라비아 주베일 담수화공장(1-A, 1-F )공사건설이야기
1978년초에 드디어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베일 담수화공사의 공무과장대리로 선임되었다.소장님은 일본어를 잘하시는 임소장님이었다.담수화공장의 공사내용은 중동국가에서 식수가 부족한 나라에서 바닷물을 이용하여 식수로 만드는 공장을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공사내용은 방파제공사(1-C---그리스회사시공),취수구 설치및 EVAPORATER 기초공사및 기기설치공사(1-A---한국 현대건설시공).발전소기기설치공사(1-B---이태리회사),단지내 도로공사(1-D---한국 동아건설시공),상수도 탱크및 상수도관매설공사(1-E---한국 한라건설(현대산업개발전신)시공,방수로공사(1-F---한국 현대건설시공)로 구성된 대규모공사로서 여러나라의 건설회사들이 만드는 공사현장이었다. 이 공사의 공식명칭은 AL JOBAIL DESAL/POWER PLANT이며, 공사규모는 30MIGD WATER /300MW POWER-PHASE 1 이었으며 바닷물을 취수하여 그 바닷물을 순간적으로 수증기로 기화시킨 후 그 수중기를 순간적으로 액화시키는 데, 그 사이에 FILTER층으로 통과케 하여 불순물을 제거한 후 그 물을 모아 학교 과학교사서에 기술된 것같이 인간에 필요한 Ca등을 섞어 마실 수 있는 물을 만들어 저장탱크에 보관하는 대형공사이었다. 필요한 전기시설을 위하여 발전소설치공사도 필요하고 필요없는 물을 버릴 방수로 공사도 주공사이다. 또한 바닷물 취수시 방수로와 구별 될 수 있는 방파제공사도 있었다. . 우리의 첫공사는 1-A공사이었으며 이 공사중 가장 핵심적인 공사였다..발주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담수화공사( SALINE WATER CONVERSION CORPORATION)이었다.그 당시는 담수화공사를 할 수 있는 허가난 업체는 소수이었다.일본의 사사쿠라회사가 상기의 1-A공사를 수주하여 미쓰비시에 하청을 주어 EVAPORATOR의 제작을 맡겼고,우리에게는 토목공사및 기기설치공사를 하는 것이었다.현장을 출발하기전 서울 본사에서 공사준비와 미쓰비시회사와의 수많은 회의를 수행 하여야 했다.공정표작성과 그에 따른 본공사및 기타자재준비,장비동원계획,그리고 인원투입계획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그 때는 주바일 항만공사를 비롯한 수많은 해외공사를 수행하여 가난한 국가의 외화획득을 수행한다는 많은 사명감도 있었다.드디어 큰아들의 출생을 보고 한달만인 1978년 06월02일에 홍콩을 경유하여 사우디 아라비아의 다란공항에 내린후 알코바지점에 인사 한후 주베일현장에 도착하였다.서울 본사에서 주는 US20불을 받고 한달된 아들괴 집사람을 두고 2년간을 근무해야한다는 사실은 너무 허탈했지만 회사명령이고,또한 나의 선택도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홍콩에서 하루 체류하며 시내관광을 하며 조그마한 라디오를 사서 모든 돈을 다 썼다. 서울서 홍콩까지는 국적기인 KAL이라서 기내에서의 음료는 무료라 마음놓고 시켰는 데,홍콩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영국의 BS인데 작은 음료도 모두 돈을 받아 그들의 째째함을 욕하였다.사우디 아라비아 다란공항에 도착후 알코바지사에 도착인사를 한후 몇시간 걸려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지나 현장에 도착하였다.밤에는 직원들이 모여 문을 잠그고 현지 해양경찰의 눈을 피해 생전 처음 포르노 필름을 보며 시간을 보냈으나 매번 보니 바로 실증이 나서 내용이 있는 필름을 보았는데 딮 토로우트가 지금도 기억된다. 6월의 사우디 아라비아의 날씨는 한증막에 들어온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짜증이 나는 살인적인 더위였다. 심한 갈증에 콜라를 두캔이나 마시고 설사로 고생도 하여 다음 부터 콜라는 눈길도 주지않았다. 그래도 좋은점은 식당에서는 한국에서 귀한 소고기등 값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모든 식재료가 세계각국에서 온 수입품으로 제법 눈길을 끄는 것도 많았다. 주방장은 저녁식사로 서울에서는 자주 먹을 수 없는 손바닥만한 소고기를 줄 때 우리는 그것을 구워서 며칠간은 계속해서 맛있게 먹었으나 바로 실증이 났다. 우리는 채소를 원했다.나중에 알고보니 주방장 입장에서는 채소는 씻어야 하는등 손이 많이가서 어렵게 준비를 해야하나, 소고기는 냉동고에서 꺼내기만 해도 되는,즉 음식준비가 쉬운 음식만 준비한다고 직원들은 불평도 했다. 하도 더운 나라이므로 작업시간은 오전 06시부터 11시까지 오전작업이고,11시부터 오후 02시까지 점심식사및 휴식시간이었다. 이 때 점심식사를 하고 바로 취침을 하면 배탈이 나서 수면시간을 조절해야했다.가장 큰고통은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이 끝나고 사무실에 가기 위하여 승용차 문을 열고 자동차를 탈 때이다. 자동차안의 열기는 지옥의 구덩이로 빠져들어 갈 정도를 연상시키는 뜨거운 열기였다. 그리고 오후 06시에 일과를 마쳤다.공무과의 차량은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포니로서 수출하기에 부적합한 자동차를 현장용으로 구매하여 이용하였다.처음으로 운전도 배웠다. 가끔 금요일 휴일에 짜장면을 먹고 싶어서 알코바의 한국인 소유의 중국음식점으로 포니를 타고 갔다.현장에서 알코바 까지의 거리는 대략 400KM의 거리이므로 이 차로는 5시간이상 소요되었다.이 차는 시속100KM이상으로 가는 것이 조금 불안하였다.특히 에어콘을 가동하고 가면 차가 떨리는 기분도 들고,아무튼 그러한 상태로 잘도 다녔다.현지인들은 대부분 미제차로 시속200KM의 속도로 우리차를 지나갈 때 우리차는 바람으로 흔들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휴무일에 할일은 없고 시간은 많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현장의 스트레스를 풀 수 밖에 없었다.젊음을 운동과 일로 소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밤에는 콘크리트로 바닥의 테니스장에서 벽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며,동시에 체력단련도 하였다. 빨래를 하여도 세탁기에서 꺼내어 건조대에 널면 왜 이렇게 빨리 마르는지.이곳의 더위는 섭씨 50도를 드나들고 있었다. 우리는 미쓰비시직원의 지시를 받으며,설계사인 미국의 샌더슨 엔드 포터회사에 자재공급승인을 받은 후 본공사를 시행하여야 했다.미쓰비시직원들도 우리나이 또래들의 직원이 많았다.그 중 일본인 한 친구가 신혼여행은 어디에서 보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나는 꺼꾸로 되물었다.너는 어디로 갔다 왔느냐고?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이곳외에는 한번도 해외여행경험이 없는 카나다를 갔다 왔다고 하여 기를 죽이지 않는가.나는 제주아일랜드를 갔다고 했다. 제주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느냐 하면서.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현장수당으로 주는 물값을 받자말자 소리통인 소니580을 사서 이미자노래 테이프를 들으면서 향수를 달랬다.그 중에 기억나는 친구는 오사와라고 본공사공정일보를 받으려고 매일 우리 사무실에 왔다.한번은 울면서 죽고 싶다고 했다.그 이유를 물으니 자기회사 현장소장에게 무능하다고 욕을 먹었다는 것이다.자살을 잘하는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보는 것 같았다.한편 본공사에 사용예정인 자재의 사용승인을 받기위하여 설계회사인 미국 뉴욕의 SANDERSON & PORTER,INC.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이곳에 온지 한달만에 가는 첫 미국 출장이었다.뉴욕공항에는 현대건설뉴욕지점에서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마침 그 때 현대건설 영국 지사장과 런던까지 동행하였다.런던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뉴욕으로 가는 출장이었다.곧장 런던으로 가야 할 비행기가 유류를 보충해야 한다고 네델란드의 한 도시에 착륙하여 유류를 보충하고 다시 런던으로 가는데 많은 시간이 지연되었다.런던공항에 도착할 즈음 동행했던 런던지사장은 뉴욕지점에 나의 비행기 지연사유를 TLX로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내리고 ,나는 승무원의 안내로 뉴욕행비행기를 갈아 탈 수 있었다.옆좌석에는 건설기술자로 보이는 미국인이 타고 있었다.3개월만에 귀국하는 데 지금 가지 않으면 아내로 부터 이혼을 당한다하니.우리는 일년만에가도 끄덕 없는 데,우리가 선진국인가,후진국인가?우리 현장의 일본인들도 일년만에 본국휴가를 갈 수 있었다. 뉴욕공항의 출입국사무실은 왜 이렇게 까다로운가?그 당시는 박동선 사건으로 한국인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을 때라 그런지.성이 박씨이니 박동선과 어떤 관계인지,담배는 하루에 몇갑이나 피우는 지 시시콜콜하게 물었다.늦은 밤에 출입국사무실에서 나오니 뉴욕지점에서 직원이 서너명이나 나와서 나를 배웅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 대해 착각을 한것이다.그 당시 우리는 TLX를 사용시 과장은 GJ,대리는 DR로 표시하는 데 내가 대리이니까 DR로 표시하여 박사급이 온줄 알고 서너명이 마중을 나왔다는 것이다.그래서 제일 직급이 아래인듯한 친구가 인근의 호텔정문까지 태워 주고는 퇴근하였다.호텔에서 미리 선금을 요청하여 일정금액을 지불한후 방을 얻을 수 있었다. 혼자서 겁도없이 46번가도 돌아다니면서 모든일을 잘처리 하였다. 뉴욕지사직원의 도움으로 미국에 이민을 와서 LA인근에 사시는 누나와 통화도 할 수 있었다. 뉴욕지사에서는 그 때 새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었다.유학중인 회장의 아들이 검소하게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는 데 지사의 고등학교동기인 직원을 통하여 그 새 차를 가지고 직원들과 호숫가로 여행을 하였다.재벌의 아들이 대개 돈을 흥청망청 사용하여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때 인데도 그는 참으로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이 새차를 타고 싶어 함께 여행을 하였으니.그는 참으로 겸손하였다.나를 위하여 숙소에서는 자기도 현대건설에도 근무했다면서 밥을 지어주어 맛있게 먹은 기억이난다. 그런데 수상스키를 탈 때는 자기만 타는 아집도 있었다.사우디 아라비아현장에 돌아와서 공사는 계획대로 추진되었으나 설계사와 발주처의 이견으로 SANDERSON & PORTER,INC,는 현장에서 철수하고 발주처에서는 새로운 영국감리자를 고용하여 우리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였다.그는 콘크리트표면이 매끄럽게 나와야 한다고 하여 거푸집을 바닷물속에 며칠식 넣은 후 사용도 하였다.영국인들은 실속보다 표면만 좋아하는구나 하는 느낌도 가졌다.일본서 EVAPORATOR가 현장에 도착하였다.그들은 일본에서 제작하여 이곳까지 바지선에 실어와서 우리는 임시부두를 만들어 육상으로 상륙시켰다.그 바람에 임시부두를 설계하느라 한동안 바뻤었다. 공사는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설계사에서는 공사기성금을 받을시 PERT CPM으로 작성을 해야 기성금을 줄 수 있다고 해서 다란석유대학에서 컴퓨터로 공정표를 작성하느라고 며칠씩 출장을 갔던 기억도 난다. 1-F공사를 또 수주하였다.감리회사는 독일회사였다. 그 해 과장으로 진급도하였다. 당시에 집에 연락하는 방법은 주베일시에 나가 하루종일 기다려 전화통화하는 것과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전화통화는 너무 어려우므로 포기하고 편지를 보냈는 데 서울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대략 14일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다행스럽게도 국적기인 KAL이 다란공항까지 직항로가 생겨서 일주일에 한번씩 다녔다.그래서 편지를 귀국자나 휴가자에게 부탁하여 서울에서 부치도록 하였다.다란출장시 KAL을 볼 때마다 처자식이 보고싶어 그리움을 참아야 했다.집에 보내는 편지에는 봉투에 일련번호를 기록하여 보냈다.왜냐하면 정식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우체국을 이용하는 것과 귀국자 인편으로 보내는 편지가 뒤죽박죽 되어 답장을 쓸 때 보내는 편지와 받는 편지의 내용이 앞뒤가 맞지않아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아내는 2년간의 편지를 번호대로 잘보관하고 있는것을 책장을 정리할 때 우연히 보았다.드디어 일년만에 20일 정기휴가를 받고 귀국하였다.김포공항에 마중나온 아들은 일년만에 본 나의 얼굴이 낯설어 얼굴을 피하며 울기만 하엿다.내마음은 너무도 섭섭하였다.아들이 아버지를 피하다니.아들 돐잔치도 했다.휴가동안 친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여 아들과 친해졌지만 그렇게도 짧은 20일의 휴가가 끝이나서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니 어린 아들이 내얼굴을 기억 할 수 있겠는가? 현장의 기능공은 한국인 대략150명,인도인 50명으로 구성되었다.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인도인들은 지시를 받을 때마다 우리에게 영어로 써자를 붙이며 경어를 사용하였다.국가의 힘이 이렇게도 큰영향력을 미친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우리가 다른 외국인을 고용하여일을 시킨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우리들도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였다.하루는 인도의 작업자 대표가 찿이왔다.자기들의 식사에 사용하는 밀가루를 C급으로 낯춰 달라고 하였다.그 이유는 그것을 먹고 사람들이 설사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그들에게 A급밀가루를 제공하였는 데 거기에는 기름진성분이 많아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인도에서는 C급밀가루를 먹다가 갑자기 이곳에서 A급밀가루를 먹어 배탈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격이 더싼 C급밀가루를 제공하여야 했다.1-F공사에는 방수로에는 건설해야 하는 많은 PLATEGIRDER교량이 있었다. 이 PLATEGIRDER는 현대중공업(주)에 발주하여 울산에서 제작하여 이곳에서 인수 받는 조건이었다.현장에 자재가 도착한후 독일회사의 나이 많은 감리자의 검측을 받았으나 주빔을 연결하는 WEB등의 치수와 두께가 0.5MM에서 1.5MM가 부족하였다.감리자는 이것을 제작한 회사가 선박을 만드는 회사냐고 불평을 하는데 난감하였다.너무 큰 문제이므로 본사를 통하여 중공업에 항의도 하였다.이 나이 많은 감리자는 60세이상으로 추측되는 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모든 부족한 치수에 대하여 철판용접으로 보완을 하라는 것이었다.우리는 밤을 세워 보완작업을 한 후 교량공사를 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그분이 고마웠다. 그분은 6.25때 한국 부산에서 일을 한적이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험 많은 그 분 덕에 문제점을 쉽게 해결 할 수 있었다.지금의 내 역활이 아닌가 하고 여러번 아름다운 기억이 나게 하였다. 어느날 시험실의 레바논 시험기사가 박대통령이 서거 했다는 뉴스를 들었다고 전해왔다. 알코바의 중동본부에 확인하니 사실이었다.우리는 제일 먼저 우리나라에 전쟁의 발생위험을 걱정하였다.모두가 초조하였고 긴장된 상태이었다.며칠 후 서울에서 국장을 지낼 때 현장에서도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인도인기능공들과 함께 할때 그들은 자기들에게 월급을 주는 나라의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의 표시를 함께 한다고 해서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국제적으로도 불안한 정세이었다.미국이 이란주재대사관의 인질을 구출하는 작전에 이어 배럴당 석유가는 너무 올라서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대통령이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 하여 석유외교를 하었다. 축구대표팀도 이 곳을 방문하여 담만운동장에서 사우디 아라비아팀과 시합을 하여 우리는 감리회사직원과 함께 응원을 하였다. 우리는 져주라고 했다.석유외교이니 그렇게 응원 하였다.진찌 우리팀이 졌다.그 팀이 미국에서 돈을 잃어버렸다는 기사를 보았다.사우디아라비아축구팀에서 받은 돈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많은 실망을 했다. 그 해 12월에는 서울에서 쿠테타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났다.불안한 날속에서도 우리는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귀국하는날이 확정되었다.군대제대보다 더욱 실감이났다.군대에 있을 때에는 외출 외박을 해서 가족을 만날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귀국을 해서야만 만날 수있지 않은가? 그런대 본사애서는 미화1,000불을 주는 조건으로 파리,런던,스위스의 관광을 한 후 귀국하라는 지시를 하여 할 수 없이 세곳을 일주일동안 좋은 구경을 하였다.선진국들의 발달되고,자연스런문화는 2년간의 사우디 아라비아의 뜨거운 생활을 모두 잊게 하였다.들리는 이야기로는 유럽관광을 하지 않고 바로 귀국한 직원에게는 미화1,000불을 회수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얼마나 집에 빨리 가고 싶었으면 그 좋은 구경도 않했을 까?귀국시 비행기는 KAL이었다.맨뒷자리의 좌석에 앉아 가족을 만날 희망에 부풀어 북극 상공쯤에서 총기사고가 났다.비행기 후미에서 남자승무원이 총기를 손질하다가 옆에서 식사하던 여승무원에게 오발사고를 일으킨 것이다.갑자기 안내방송은 승객중 의사를 찾았다.우리 일행은 서로 총소리를 들었느니,아니니 말싸움도 하였다.안내방송은 비행기가 회항한다는 것이다.미군병원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우리는 너무 놀라서 비행기는 안전한지 겁이 났다.몇 년전에 쏘련에서 KAL의 동체착륙의 기억이나서 두려웠다.드디어 5시간이상 지연되어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안내방송은 승객들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경찰이 사건의 현장조사를 해야한다고 했다.30분이상 이 지난 후에 비행기에서 내린 후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그 비행기의 마중나온든 가족들은 도착시간보다 5시간30분이상 더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지연사유에 대하여 사과한마디 없는 것이 괘씸하였다. 그 후에 조종사이셨던 형님이 말씀하시길 그 여승무원은 부상을 당하여 미국에서 치료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2년간의 생활이 가족과의 생이별의 시간이었지만 국가에도 도움을 주었고,내 개인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은 내 생애 가장 인상적인 시기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수많은 국가의 기술자들이 한 곳에 모여 문제점을 협의 해가면서 공사를 수행했던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